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返觀自己 -사집과 현담

최고관리자 | 2014.05.29 14:56 | 조회 3039

返觀自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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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집반 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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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사집반 현담입니다.

저 세마디의 말. 들으시면서 어떻게 느끼셨습니까? 제겐 저 말들이 지난 치문 1년을 살게 해 준 주옥같은 말이자 화두였습니다.

대중스님들 모두 다른 이 때문에 성내는 마음을 일으킨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분명 내 잘못이 아닌데 자꾸 나만 경책하시는 상반 스님, 내가 하는 일마다 간섭하며 몇 마디 씩 늘어놓는 도반 스님, 자기주장만 고집하는 도반 스님 등. 때때로 야속함을 넘어 진심까지 일으키곤 합니다.

금강경 16능정업장분에 보면 약위인경천 시인 선세죄업 응타악도 이금세인경천고 선세죄업 즉위소멸 당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천대와 업신여김을 당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전생에 지은 죄업 때문이다. 그는 마땅히 지옥에 떨어져야 하나 지금 사람들이 그를 경시하고 천대했기 때문에 선세의 죄업이 소멸하고 마땅히 위없는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제 치문반 시절 중 가장 힘든 때에 만났습니다. 계속되는 울력으로 몸도 마음도 지쳤기 때문이었을까요. 학기 초부터 저와 견해차이로 간혹 부딪히곤 했던 한 스님과의 마찰이 부쩍 잦아졌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의 사소한 마찰이 큰 언쟁으로 번졌습니다.

그 땐 순간적으로 일어난 분심에 마음을 빼앗겨 앞뒤 생각 않고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대중에 알려지며 그 날의 논쟁은 결국 대중 참회로 이어졌습니다. 작은 시작은 큰 결과를 낳았습니다. 언쟁했던 스님과 함께 대중이 머무는 큰방을 돌며 참회하고, 급기야는 반 스님들 전원이 함께 대웅전에 가 절 참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이러한 일들을 겪었음에도 그 스님을 향한 분심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그 스님의 몇 마디 말에도 진심을 느껴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불편해지곤 했습니다.

그렇게 가슴 속 앙금만 남긴 채 가을철은 지나갔습니다. 겨울철에 들어 새벽 입선 시간에 금강경을 독송하게 되며 제 자신을 관조할 기회를 만났습니다. 그것은 좁은 마음자리 깊숙이 스며있는 미움이라는 관념이었습니다.

금강경 제 18일제동관분에서 설하신 여래설제심 개위비심 시명위심이라는 말씀처럼, “모든 마음은 다 마음이 아니고, 그 이름이 다만 마음일 뿐이었습니다. 제가 마음에 미움과 원망이라는 이름을 덧씌운 채 상대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자꾸만 분심이 저를 갉아먹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마음을 바라보게 되자 수용하는 일은 더욱 쉬워졌습니다. ‘저 사람은 왜 내게 저럴까하며 원망만 하던 마음에서 나아가 내가 언젠가 그와 이러한 관계를 맺게 될 이유를 지었을 것이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다잡았습니다.

그러던 중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과정이 없었더라면, 저는 금강경 말씀을 따라 이렇듯 제 마음을 관조하지 못했을 거란 사실을. 눈 덮인 땅 속에서 어린 새순이 작은 생명력을 키워가듯, 어느새 저는 조금씩 자라고 있었던 겁니다. 생각을 바꾸게 되자 밉기만 했던 그 스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이후로 제 강원생활은 밝게 개었습니다. 도반스님들과 마찰을 빚을 때도, 상반스님들에게 경책을 들을 때에도 속으로 끊임없이 세 마디의 말을 되새겼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오늘도 덕분에 제 자신을 관조하게 되었습니다.

흔히 어른스님들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세상에 나는 이유는 크게 두 종류라고 합니다. 바로 첫 번째는 빚 갚기 위해 나온 사람, 다음은 빚 받으러 나온 사람입니다.

무시이래로 이어져온 윤회의 과정에서 우리는 끝없이 인연을 짓고, 다시 그 인연으로 만나 빚을 주고받습니다. 빠져나갈 길을 알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 인연의 고리는 끊임없이 이어져 우리의 생을 잠식합니다. 우리는 이 고리를 끊기 위해 삭발 염의하고 출가 사문이 되었습니다.

저는 인연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첫 번째 방법으로 고난에 감사하는 자세를 찾았고, 현재 실천하기 위해 노력중입니다.

대중 스님 여러분. 그 중에서도 이제 서서히 운문사 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치문반 스님 여러분. 지금 누군가 때문에 힘드신가요? 혹시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를 향한 미움의 싹을 키워가고 있지는 않은가요? 그렇다면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을 가장 아프게 하는 사람이,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이, 사실은 가장 고마운 이라는 것을요.

마음에서 한발자국 떨어져 바라보면 미움이라는 관념 자체는 온데간데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모든 일의 근원점은 결국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됐다고 깨달으면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걸림 없이 살 줄 알라행복도 내가 짓는 것이요 불행도 내가 짓는 것이네. 진실로 그 행복과 불행은 다른 사람이 지은 것 아니네란 구절이 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내 자신에서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한다면 그것은 내 자신의 괴로움으로 남을 뿐입니다. 오늘 제 법문을 들으신 대중 스님 여러분 모두 그러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기를 발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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