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사교과 무진

최고관리자 | 2016.01.26 15:16 | 조회 2602

和請, 眞理의 노래

 

무진/사교과

 

안녕하십니까? ‘화청, 진리의 노래라는 주제로 대중스님과 함께할 사교반 무진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화청은 불교 포교의 한 방편으로 대중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민속음악에다 그 교리를 쉽게 이해시키고 신봉하게 하는 사설을 얹어서 부르는 불교음악으로 정의됩니다. 쉽게 말해 대중 교화 기능을 지닌 불교 음악인 셈입니다.

화청의 역사는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중국을 거쳐 전래된 대승경전은 어려운 한자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불교의 귀족화를 초래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의 세습을 우려한 선승들은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대승의 요지를 쉽게 풀어낸 노랫말에 친근한 우리가락을 붙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화청의 초석입니다.

옛 어른들의 손을 무수히 거쳐 온 만큼, 오늘날 화청의 노랫말은 큰 문학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화청은 대중들에게 친숙한 4 · 4조의 전통적인 가사체를 인용하는 한편 내용 구성에 있어서는 정형화된 방식을 띄는데, ‘지극한 마음으로 듣기를 청한다는 뜻의 지심걸청 지심걸청 / 일회대중 일심봉청 / 거일랑 두어두고 / 여보시오 시주님네 / 이내말씀을 들어보소라는 가사로 시작해 불보살님께 귀의하며 끝마치는 것이 통상적입니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불교의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一切皆苦 그리고 열반적정涅槃寂靜三法印을 일상적인 비유와 언어로 쉽게 풀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음은 일반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서산대사 <별회심곡>의 일부분입니다.

 

인간 백년 다 살아도 / 병든 날과 잠든 날과 / 걱정 근심 다 제하면 / 단 사십도 못살 인생 ……

明沙十里 해당화야 / 꽃 진다고 설워마라 / 明年三月 봄이 오면 / 너는 다시 피련만은 / 우리 인생 한 번 가면 / 다시 오기 어려워라 ……

선심하고 마음 닦아 / 不義行事 하지마소 …… 바라나니 우리 형제 / 자선사업 많이 하세 / 내생길을 잘 닦아서 / 극락으로 나아가세 ……

나무 아미타불 / 나무 관세음보살

 

이와 같이 화청은 역사와 예술적 측면을 아우르는 가치 뿐 아니라 대중성이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그간 승가 내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이는 조선후기 걸립패, 남사당패 등이 구걸을 목적으로 부르기 시작한 화청이 난무함에 따라서 범패승들이 화청을 꺼리게 되고, 여기에 조계종 정화운동 등이 더해진 복합적인 결과물로 보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청은 본래 뜻에서 한참 벗어난 오해까지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오해는 명칭에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화청은 <회심곡>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회심곡>은 엄밀히 말해 <백발가>, <몽환가> 등과 함께 그 종류가 무수히 많은 화청의 한 갈래에 속할 뿐, 그 자체를 대표하지는 않습니다.

또 다른 오해는 화청이 시식의 착어나 고혼청처럼 영가에게 하는 염불이라는 것입니다. 영산재 등에서 화청이 상단불공 후반부에 불리는 것이 통례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러한 오해가 뿌리 깊게 박힌 탓인지, 현재 일부 사찰에서는 화청을 부를 때 영단의 위패와 사진 등을 상단 앞에 내려 모시는 기이한 풍경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화청의 주된 청자는 누구일까요?

화청은 화합할 에 청할 자를 사용합니다. 오욕五慾에 시달리는 어지러운 중생심衆生心을 화합시키기를 청한다는 뜻입니다. <회심곡> 또한 대중들의 한 마음을 돌이키는 노래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즉 화청은 그 법회에 참석한 사생육도의 모든 대중들을 교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저는 몇 년 전, 화청을 들으며 두 손을 꼭 모은 채 눈물을 찍어내던 보살님들의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매 구절마다 인간살이의 공도公道와 무상함이 담긴 화청은 그들에게 있어 불보살의 음성이요, 무진법문無盡法門이었을 것입니다.

중생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는 어장스님의 청아한 염불소리와 재장에 운집한 사부대중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질 때, 맨 살갗을 스치는 바람마저도 범음梵音과 공명하는 듯 느껴지는 그 순간을 저는 一心이며 不二라고 말하겠습니다.

화청은 불가에서 수천년을 내려온 뛰어난 포교 방편이자 고유 음악인 동시에 승문 권속 모두가 주인으로서 지키고 계승해야 할 문화유산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 의식 주변을 감도는 분위기는 초심납자初心衲子 인 제 눈에도 다소 염려스럽습니다. 불교의식 연구 시 불교계 내의 전문가를 찾을 수 없어 외부에서 민속학자를 초빙하거나, 속인 학자들이 화청과 범패를 마치 서양음악처럼 음표화해서 관련 논문집을 내는 등 씁쓸한 풍경이 승가 전통 의식이 처한 현주소입니다.

심지어 일부 논문은 공공연하게 비구니를 여승이라고 명기하고, 승려를 속명으로 표기하는 등 불교문화에 대한 수용도가 미비하다는 사실 또한 큰 문제로 보입니다. 일반 학자들에게 있어 불교의식은 연구대상인 단순 기능일 뿐, 수행 방식이 아닙니다. 이러한 인식이 문서화되어 학계에 보급된다고 가정했을 때, 머지않아 불교의 존엄성은 크게 추락하리라 예상됩니다.

불교의식은 가사장삼을 수한 우리의 모습을 가장 승려답게 해주는 전통이자 시방세계의 모든 중생들에게 전하는 無上法門입니다. 이러한 전통에 대해 바로 알고 보는 것이 이 땅의 불법을 수호함에 있어 굳센 지지대가 되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오늘 법문이 대중스님들의 가슴에 작은 울림으로 퍼지기를 두 손 모아 발원하며, 이만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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