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 사교반 진하

가람지기 | 2022.07.03 13:26 | 조회 840

안녕하십니까, 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는 주제로 차례법문을 하는 사교반 진하입니다.

전 세계 5억명 이상 인구가 코로나 19로 고통받는 가운데, 지구 한쪽 편에서는 전쟁으로, 또 한쪽 편에서는 이상기후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삶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같은 사바세계 속에서도 운문사 청정수월도량에서 오늘 하루 이렇게 무사히 부처님 법을 배울 수 있어 참으로 경이롭고 감사합니다. 깊은 원력으로 이끌어주신 부처님과 모든 스님들께 깊이 감사 올리며 법문을 시작하겠습니다.

 

隨處作主 立處皆眞은 지금 제 마음 속의 주제입니다. ‘어디에 가든 주인이 된다면, 서있는 곳마다 그대로가 모두 참이 된다.’ 운문사에서, 그리고 지금 이 세상에서 주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 구절과의 인연은 은사스님과의 대화에서 시작됩니다.

작년 이맘때, 청풍료에서 사집을 보내던 저는 주어진 소임을 열심히 살며 하루하루 분주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기도, 화두, 독경 등에 열중하는 도반들 속에서 유독 저만 방향 없이 둥둥 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방학이 되어 본사에 간 저는 은사스님께 여쭈었습니다.

 

스님, 다들 계획과 목표를 갖고 강원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저는 뭘하고 살아야 강원에서 잘 살았다고 하겠습니까?”

 

은사스님께서는 딱하게 저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초등학생이 밥 잘먹고 잘 놀면 되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이겠느냐? 너는 <隨處作主 立處皆眞>을 책상에 붙여놓고 매일 보면서 살거라!”

 

수처작주 입처개진. 과연 주어진 소임을 주인의식을 갖고 열심히 살다보면 도통하리라는 은사스님의 격려일까요? 바른 이해를 위해 전후 맥락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구절은 중국 당나라 선승인 임제 의현 선사가 대중에게 강설하신 내용으로 임제록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불법이란 애써 공을 들여서 하는 것이 아니요 그저 평상대로 아무 일 없이 하는 것이니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자신 밖을 향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모두가 어리석고 고집스런 놈들이다.’ 하였다.

隨處作主 立處皆眞, 그대가 어디를 가나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그대로가 모두 참이 되어 어떤 경계가 다가온다 하여도 끄달리지 않는 것이니

비록 습기와 오무간업이 일어날지라도 저절로 해탈의 큰 바다로 변할 것이다.“

 

부처님 법은 애써 공들이지 않고 일없이 하는 것이라는데 주인이 어떻게 일이 없을 수 있으며, 무간지옥에 들어갈 죄업은 어떻게 녹이는 것일까요. 무수한 물음표를 가슴에 품은 채 경반에 올라와서 금강경과 원각경을 수지독송합니다. 그 시간이 켜켜이 쌓이면 쌓일수록, 얼음이 조금씩 녹듯 제 경험 속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작년 여름, 속가 부친이 위독하여 곧 임종할 것 같다는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코로나19 백신 부작용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음 날 아침이 밝으면 바로 서울 병원으로 출타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고 그날 밤 청풍료 큰방 이부자리에 누워 부친을 떠올렸습니다. ‘과연 내가 어떻게 해드려야 평안하게 가실 수 있을까.’

그런데 그 부친이란 도대체 무엇인걸까요? 이제 정말 그분이 세상을 뜨면 그 몸은 간데없이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그를 괴롭혔던 고통은 더 이상 그 곳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아버지라고 여겼던 그 마음도 정신도 더 이상 그곳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눈앞에 밝은 창공이 보이는 듯 했습니다. 어느 한 곳에도 붙잡혀있지 않아서 지금 여기 나와, 그리고 모두와 함께 있는 밝은 허공 말입니다. 그 허공에는 이미 아버지라곤 먼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무수한 허공꽃이 제 마음을 따라 과거 현재 미래로 이끌리며 흔들릴 뿐이었습니다. 나와 아버지, 모두의 마음이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사라진 것조차 사라져 버린 원각의 실체는 그대로 이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바로 보인 순간 나와 이 세계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며, 진짜 가야 할 길이 바로 이 길이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수처작주란, 깊은 내면으로 눈을 돌리고 마음을 바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을 절실히 체득하여 바깥 경계에 휘둘리지 않으니 역설적으로 그 어떤 곳에서도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원각경 보현보살장에서 부처님께서는 一切衆生種種幻化 皆生如來圓覺妙心, 일체 중생의 갖가지 허공꽃이 모두 여래의 원각묘심에서 생한다고 하였습니다. 저와 여기 계신 모든 스님들, 뿐만 아니라 문밖의 고양이와 나무와 돌멩이는 허공에서 아물거리는 허공꽃이며 모두 원각묘심에서 비롯합니다. 이를 바로 보는 것이야말로 입처개진이라 생각합니다.

은사스님께서는 자신 밖을 향해 공부를 지으려는 저에게 초발심의 그 자리로 돌아가 수처작주 입처개진 하라고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이제 현시대 속에서 수처작주 입처개진 하기 위해 사유를 확장해보겠습니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전은 그야말로 눈부십니다. 인간보다 더 출중한 인공지능이 개발되고 인터넷 공간과 우리의 신체는 점점 하나가 되어 갑니다. 고도의 의료기술은 인간 수명을 500살까지도 내다보려 합니다. 인간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조건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질 미래에, 우리는 어떻게 수행하고 어떻게 정진해 나가야 할까요?

고통 없는 행복한 땅 북구로주의 사람들은 수명이 천살이나 되지만, 너무 행복하기 때문에 도리어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고 성불하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현 문명은 북구로주의 행복과 비슷한 방향을 지향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통 없는 행복과 생명의 연장이 마냥 좋기만 할까요? 고통과 죽음을 직시하는 것은 집착을 버리고 공을 바로 보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 부처도 있고 원각도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인과 속에서 발생하는 시대적 흐름이기에 과연 저항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유의미한 일인지는 답을 내리지 못하겠습니다. 발아래 밟히는 모래알에서 원각이 투명하게 빛나듯, 새로 태어날 AI에게서도 빛나는 원각묘심을 볼 따름입니다.

 

다시 작년 여름으로 돌아가 남은 이야기를 마저 드리겠습니다. 부친을 문병하기 위해 다음 날 아침이 되어 서울에 올라갔습니다. 장례까지 염두에 두고 가사 장삼을 다 챙겨 갔는데 다음 날 아침, 부친이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그 당시 부친은 마구니들 속에서 고통받는 꿈을 꾸던 중, 갑자기 수많은 동자승들이 찾아와 건네주는 깨끗한 물을 마시고 깨어났다고 합니다. 그때 도량의 많은 스님들께서 함께 기도해주신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학인스님들의 마음이 동자승의 모습으로 꿈에 나타난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무소식을 희소식 삼아 지내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한 학인이 강원을 다니는 동안 큰일 겪지 않고 평안한 마음으로 공부에 전념 하게끔 기도해주신 대중 스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체가 환이므로, 견고한 인과마저도 뒤바꿀 힘 또한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이 진정 환이 아니었다면, 모두의 마음이 전해져 제 부친이 쾌차하는 비과학적인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신기루 같은 세상을 무시 이래로 지금까지 그리고 끝이 없는 미래까지 관통하며 중생의 손을 놓지 않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이자 보살님들의 원력일 것입니다. 오늘도 이 변화하고 스러지는 땅 위에 서 있는 운문 수월도량에서 영원히 빛나는 불보살님의 원력을 보고 느낍니다. 불보살님과 모든 스님들께 깊은 감사를 올리며, 환으로써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그 서원과 함께 이 세상이 다하는 날까지 일체 중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끝으로 수처작주 입처개진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며 금강경 오가해의 야부스님 게송을 독송하겠습니다.

 

천척사륜직하수 일파자동만파수 야정수한어불식 만선공재월명귀

千尺絲綸直下垂 一波縡動萬波隨 夜靜水寒魚不食 滿船空載月明歸

나무 아미타불

 

천 자나 되는 긴 실을 곧게 드리우니

한 물결이 막 일어나매 만 물결이 따르도다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가워 고기가 물지 않으니

배에 가득히 허공만 싣고 달 밝은데 돌아오도다.

 

 

성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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