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무엇일까요? - 화엄반 성륜

가람지기 | 2022.07.03 13:38 | 조회 501

반갑습니다. 화엄반 성륜입니다.

 

오늘 법문에서는 행자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들어온 가르침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원효스님은 발심수행장에서 자비롭게 이것을 하는 것이 부처님의 혜명을 잇는 법왕자라고 하셨고, 야운비구는 자경문에서 자비롭게 이것을 행하면 반드시 악도를 미리 막아준다하였으며, 서산대사께서는 선가귀감에서 곤궁한 사람이 도움을 청하면 분수껏 나누어주라 동체대비가 참된 이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금강경, 화엄경 등 많은 대승경전에 빠짐없이 나오는 가르침입니다. 자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예 바로 보시바라밀입니다. 잘 대답하였습니다.

 

보시란 준다 또는 버린다는 뜻이고, ‘바라밀은 생사의 바다를 건너 열반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 실천 방법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어서 모두 다 버릴 수 있을 때에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보시로써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사리불은 60겁 동안 보살도를 행하면서 보시로써 생사의 바다를 건너려고 하였습니다. 어느 날 걸인이 와서 그의 눈을 구걸하자 사리불은 눈 하나를 뽑아 주었습니다. 걸인은 그 눈을 받아들고 사리불 앞에서 냄새를 맡으며 역한 냄새가 난다고 하면서 땅에 버리고는 발로 밟았습니다. 이에 사리불이 생각하기를 이런 하찮은 사람들은 제도하기 어렵구나! 눈이 실제로 필요하지도 않은데 일부러 그것을 찾고 얻고 나서는 버려서 밟아 버렸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제도할 수 없으니 차라리 스스로 닦아 신속히 생사를 벗어나느니만 못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보살도에서 퇴보하여 소승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우리들은 어떤가요? 눈알이 아니라 사탕을 주었다고 생각하더라도 갖가지 마음이 일어납니다.

보통 우리들은 자신이 지은 복에 대해 대가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대가가 기대만큼 돌아오지 않으면 섭섭해 하고, 괘씸해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상대는 이렇게 해주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목적 달성이나 명성, 칭찬 등 욕심을 위해 복을 지으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보시를 할 때, ‘내가 너한테 이 소중한 눈알을 또는 사탕을 주었는데라고 하는 생각, , ‘내가 주었고 상대는 받았으며, 베푸는 물건이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그냥 보시일 뿐 보시바라밀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단순한 보시가 아닌 보시바라밀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마음을 관찰해야 할까요? 먼저 나다 남이다, 또는 있다 없다, 좋다 싫다등의 상반되는 견해를 떠나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나와 남에 대한 분별이 없게 되고 나와 남, 보시라는 행위에 실체가 없어서 공하다는 것을 곰곰히 사무치게 알게 됩니다. 이러한 지혜가 있을 때, ‘동체대비, 나와 남이 한 몸인 줄 알아 큰 자비심이 생기며, 보시한다는 생각조차 떠나서 진정으로 보시를 행하는 무주상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대주혜해大珠慧海스님이 지은 돈오입도요문론 頓悟入道要門論에서도 보시바라밀로 단박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시는 버리는 것을 말하는데, 무엇을 버리냐 하면 바로 두 가지 성품을 버리는 것입니다. 두 가지 성품이란, ‘선과 악, 있다와 없다, 좋다와 싫다등 일체의 한 곳으로 치우친 견해를 말합니다. 이러한 변견을 버려 일체 모든 것을 전부 보시하면, ‘선과 악, 있다와 없다 등의 성품이 모두 공함을 알게 되며, 두 가지 성품이 공하다는 생각도 짓지 않고, 보시한다는 생각 즉 버렸다는 생각도 짓지 않으면 진실로 보시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시바라밀을 수행하면 육바라밀을 모두 구족한 것이 되는데, 왜냐하면 바라밀 법이 모두 양변을 버려 중도를 바르게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체 모든 것이 공하여 실체가 없음을 알면, 집착하지 않으므로 마음에 그릇됨이 없고, 그릇됨이 없기 때문에 지켜야 할 조차 없습니다. 를 초월해서 사는 사람은 절대 남을 해치거나, 자신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등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저지르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주 작은 미물도 이 사람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을 느낍니다. 이것이 지계바라밀입니다.

나와 남이 따로 없고 옳다 그르다가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다툴 일이 없습니다. 속이고 때리고 모욕을 주어도 맞부딪쳐 화를 내는 라는 것에 실체가 없는 줄 알면, 욕을 하고 괴롭히는 상대도 없고 욕을 받는 주체 또한 없음을 알아 조금도 동요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인욕바라밀입니다.

마음에 동요가 없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와도 끊임없이 수행하며 보살행을 실천하니 이는 정진바라밀입니다.

분별을 버리는 것은 곧 번뇌를 버린 것이니, 번뇌가 없으면 정신이 맑고 정신이 맑으면 저절로 삼매에 들어가니 선정바라밀입니다.

마지막으로 번뇌를 버려 삼매에 들면 자성청정한 본 마음이 드러나 지혜가 현전하니 이는 반야바라밀입니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법이 이름만 다를 뿐, 양변을 버려 일체 번뇌를 버린 것으로 근본을 삼으니 단함만행檀含萬行이라. ‘보시바라밀이 만 가지 행을 다 구족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대사의 금강경金剛經』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에 대한 게송인 단바라밀보시송檀波羅蜜布施頌은 앞에서 설명한 보시바라밀의 본질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施門通六行 六行束三檀 (시문통육행 육행속삼단)

資生無畏法 聲色勿相干 (자생무외법 성색물상간)

보시의 문이 육바라밀 행과 통하니 /육도만행 묶어보면 세 가지의 보시라네

재보시 무외보시 법보시는 /소리나 형색이 간여할 곳이 아니니

二邊純莫立 中道不須安 (이변순막립 중도불수안)

欲覓無生處 背境向心觀 (욕멱무생처 배경향심관)

양변을 세우지 말고 /‘중도라는 마음에도 머물지 말지니

생사 없는 무생처를 보고자 한다면/ 경계를 등지고 마음을 향하여 관할지니라

 

보시바라밀을 행하는 것은 육바라밀과 온갖 보살행을 행하는 것과 통하니, 이런 보시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판단하는 마음, , ‘좋다 싫다, 크다 작다, 맛있다 맛없다와 같이 분별하고 왔다 갔다하며 생겼다 사라지는 마음이 간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나와 남, 좋다 싫다등 경계 따라 생겼다 사라지는 분별하는 마음을 버리고, 분별이 없어 중도라는 마음도 등져 움직이지 않는 항상한 마음, , 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면서 들을 줄 알고, 볼 줄 알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지를 관하면, 생사를 떠난 깨달음의 자리를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상반되는 두 가지 주장을 내세워 한쪽에 치우치는 집착이 없고, ‘두 가지 주장을 벗어나 집착이 없다는 마음조차 버렸을 때, 진실로 바라밀행이 됩니다. 보시바라밀은 허망한 분별을 버리고, 대상을 보는 마음작용이 없이 다른 사람에게 공덕과 이익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상에 얽매이는 마음을 떠난 마음 자체를 관찰할 때 생사 없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보통 변견을 버리지 못하고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집착해 있으므로 생사가 일어난 마음 때문에 본래심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참선, 염불, 간경, 기도 등의 수행을 통해 모든 것이 실체가 없어 공하다는 것을 알고 자성 청정한 본마음을 직접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지혜가 현전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을 관찰하면서 보시를 행한다면 점차 보시바라밀을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대중 생활은 보시를 실천하기에 좋은 환경입니다. 다양한 도반들의 생각을 접하며 본래 옳고 그름으로 가를 수 없음을 알게 되면 적대시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도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와 축원을 하고, 경을 읽고, 공양을 짓고, 소임을 살며 모두에게 이익을 줄 수 있고, 힘들어하는 도반을 돕다 보면 도반과 내가 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님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모두를 한 몸처럼 알고 베풀며 다만 모두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보시를 행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비유하건데 생사의 바다를 건너다가 중도에 폐하는 것을 일러 피안에 이르지 못했다.’라고 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사리불 존자와 같은 경우입니다. 60겁 동안 보시를 행하더라도, 금은보화와 내 몸을 모두 보시하더라도 보시바라밀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면 깨달음과는 십만팔천리로 멀어져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법의 본질을 알고 원력으로 바라밀 행을 해나간다면 어떤 고난이 있어도 도중에 성취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행동은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대중 스님 여러분, 모두 크고 광대한 원으로 바라밀 행을 잘 실천하셔서 모두 다 함께 성불하여지기를 간절히 발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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