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기준 - 사교반 도솔

가람지기 | 2024.06.14 20:05 | 조회 132

안녕하십니까? 기준이라는 주제로 차례법문을 하게 된 사교반 도솔입니다.

 

기준의 사전적 의미로는

 

터 기 준 할 준 을 사용하며 사물에 기본이 되는 표준이라고 정의합니다.

 

출가 전 저의 기준은 가족이었습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가족이 항상 먼저였고 그 다음은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하고자 하는 것에 후회 없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저에겐 집안 어른들이 항상 우선이었기에 밖에서 놀고 있다가도 전화 한 번에 친구들을 두고서 집으로 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준은 무엇인가요?!

 

흔히 세속에서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기준에는 명, . 즉 명예와 돈 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과연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명예와 이익이 가져다주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주목받는 삶, 필요한 것과 서비스 등을 구매하거나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그저 개인적인 만족감 또는 사람들의 인정과 부러움의 시선을 누리게 해주지만 동시에 허무함과 허탈감을 주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부처님의 말씀 중 공덕녀와 흑암녀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짧게 이야기를 해드리자면 절세미인이자 건강, 행복 그리고 재물을 모두 안겨주는 공덕녀, 이런 공덕녀에게 푹 빠져버린 장자, 그리고 공덕녀의 동생이자 추녀 중의 추녀이자 재수(財數) 를 가진 흑암녀.

 

같이 살자고 제안한 장자, 공덕녀는 조건을 겁니다.

그 조건은 자신의 동생을 데리고 살게 해 준다면 수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자는 오케이를 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데려온 동생을 본 장자는 언니와 닮은 곳이 하나도 없어서 놀랐습니다.

장자는 동생을 쫓아내려 하였으나 흑암녀는 소리치며 내가 가면 언니도 나와 함께 가야 한다.”라고 말했고 장자는 결국 공덕녀마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흔하게 가지고 있는 기준은 지극히 개인적이기에 행복감만 줄 것 같지만 마치 손에는 손바닥과 손등이 함께하듯이 조건이 조금만 바뀌어도 뒤따라오는 불행을 우리는 절대 피할 수 없습니다.

외적으로 보이는 것이 기준이 된 지금의 사회에서는 당장 혀끝에 느껴지는 달콤함만 좇다가 끊임없이 따라오는 허무감을 덮기 위해 더 강한 단맛을 찾는 중독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출가를 한 우리 수행자들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요?

 

지금의 사회는 출가라는 것을 너무 어렵게 또는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그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기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수행자의 기준은 신심과 알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신심의 정의는 어떤 것을 옳다고 굳게 믿는 마음이라고 하는데, 믿음도 중요하지만 궁금함에서 생겨나는 신심도 신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불상마다 형태가 다른지 손 모양은 왜 다른지 다 비슷해 보인데 명호가 왜 다 다른지.

 

그리고 스님이라는 존재를 알고자 하는 것보다는 부처님이 어떠한 존재인지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면서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내 마음은 어떠한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세속에 있을 때 불자였지만 사실 잘 몰라요, 정말로, 그저 같이 가는 저희 어머니 보살님이 시켜서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절에 가는 것은 좋아했지만 궁금한 것에 대해서는 아 그렇구나.’ 라는 생각으로 수긍했기에 수행자의 길을 갈 생각은 일도 없었고 그저 재가 신도로서 열심히 수행하면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을 장애 없이 잘할 수 있으면 된 것이다. 라는 생각으로 신행을 했지만, 지금은 머리를 깎은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선택은 정말 한순간이지만 이 선택을 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을 제가 가진 많은 업을 만나야 했었고, 지금도 만나는 중입니다.

 

요즘 독송하는 금강경을 보면서 나는 기준은 없다고 말했지만 알게 모르게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에 더 많은 업을 만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에

 

저를 일깨워준 구절은

 

10 장엄정토분에 나오는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입니다.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하나의 모양에 집착해서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 것이며, 마땅히 소리나 냄새나 맛이나 촉감이나 뜻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지 말 것이며, 마땅히 하나에 집착하여 고정되어 머문 바 없이, 그 마음을 바르게 내어아 하느니라."

 

알게 모르게 기준이라는 것에 집착하여 살았고 남의 눈과 이목을 신경쓰고 있었고 못 해본 것들에 대한 후회를 핑계로 삼아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제대로 마주한 순간이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던 문제와 마주하니 처음에는 부정도 했었으나 지금은 부정도 하고 인정도 하면서 받아들이는 중입니다.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인다면 기준이라는 게 필요할까요

 

여러분들의 기준은 무었인가요?

 

여러분들은 기준 뿐만 아니라 무언가에 집착하여 지금을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부족한 법문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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