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의 그릇이 온전해야 선정의 물이 고이고, 선정의 물이 고여야 지혜의 달이 뜬다.”
대중 스님들께 여쭙니다.
온전한 계의 그릇이 무엇입니까.
온전한 계의 그릇이 무엇입니까.
온전한 계의 그릇이 무엇입니까.
절대성과 상대성, 양변을 여읜 중도로서의 계율.
안녕하십니까, 화엄반 영원입니다.
출가를 하기 전에는 5계와 더불어 음식에 관한 계율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좌선을 하는 것이 수행이라 생각했습니다. 행자 때 엄격하게 음식을 가렸던 도반이 다른 행자들과 갈등이 있던 모습을 보았습니다. 행자 수계교육에서 보살계를 받고 나서는 왜 음식을 가리는 스님들이 음식 가리지 않는 스님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강원에서 공부를 하면서,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데바닷다가 5법을 제시하며 ‘엄격한’ 계율제정을 주장했고, 후래에 인도에 제바종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처님 열반 후 율과 법의 해석에 관한 문제로 여러 부파가 나누어졌습니다. 부처님 당시의 계율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스님들과 상황에 따라 조금 바뀌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스님들로 나뉜 것입니다.
육조 스님께서는 계율, 선정, 지혜를 설명하시면서 ‘마음에 그릇됨이 없는 것이 자성의 계’라며 ‘자기의 성품을 깨치면 또한 계·정·혜도 세우지 않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계율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제 안에는 이유 모를 답답함이 쌓여 갔습니다. 그 답답함의 원인도, 대상도 알 수 없었고, 도대체 어떤 텍스트를 봐야 저의 궁금증이 명확해질지, 해결이 될지도 잘 몰랐습니다. 답이 없던 계율에 대한 산발적인 답답함이 화엄반 봄철에서야 그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바라이’ 그리고 ‘파계’, ‘단두죄’ 등의 계율의 절대성을 강조했던 부분과 ‘상황에 따라 개차할 수 있는 점’ 그리고 ‘시대, 지역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가능성’ 등의 계율의 상대적인 부분. 이들이 충돌하면서 제 안에 계율에 대한 불신이 생겼던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충돌하면서 제 안에 계율을 경시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었습니다.
계율에 대한 상대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상황에 따라 계율을 개차開遮할 수 있다는 점은 곧 계율정신이라는 큰 틀 안에서의 세부사항에 대한 유동성으로 수렴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논의는 부처님 열반 후 율과 법에 대한 최초결집에서도 있었습니다.
왕사성 결집이 끝나갈 무렵 아난 존자께서 갑자기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기 전에, 승단이 원한다면 소소계는 버려도 좋다고 하셨습니다’라는 놀라운 말을 꺼냈습니다. 이를 들은 장로들은 당황스러워하며 “너는 부처님께 소소계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여쭈어 보았느냐?” 하고 아난에게 물었고, 아난은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그 이후로 소소계가 무엇인가에 대한 아라한들의 치열한 논쟁이 이어졌으나 결론이 나지 않자 함부로 소소계의 내용을 정할 수 없었고, 결국 부처님 당시의 계율을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불제불개변佛制不改變의 의견으로 모아졌습니다.
소소계에 관한 논쟁. 이 논쟁으로 인해서 저희는 계율을 지범개차持犯開遮할 때 오류를 범할 조그마한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계율의 현대적 해석으로 문제가 되었던 예시를 두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첫째는 태국과 스리랑카 스님들이 담배를 피웠었는데, 그 이유가 율장에 출가수행자의 흡연에 대한 특별한 조문이 만들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 합니다. 물론 2000년대 이후로 대중화합을 깨뜨린다는 율장정신에 의해서 금연운동이 일어나기는 했습니다.
둘째는 현재 대한민국 출가승려의 오후불식과 육식에 관한 계율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스님들이 존경받는 이유를 꼽으라고 하면 ‘음욕과 식육에 관한 절제’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상좌부 계통의 율장에서는 삼정육은 육식이 가능하지만 일종식, 오후불식을 강조하고 있고, 대승보살계에서는 오신채와 육식을 금하고 있습니다. 계율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없는 저희는 어떠한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 공부하는 데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탐심을 바탕으로 계율을 취사선택하거나 주변의 예시를 무차별적으로 보고 배운다면 초발심자들의 견고하고 청정해야하는 계체가 혹여 온전치 못하게 될까 우려됩니다. 그렇기에 저희는 계율 문자 그대로의 지범이 아닌 계율제정의 목적을 정확하게 인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계율정신을 바탕으로 지범개차의 기준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앞서 담배를 피웠던 남방의 수행자들에게도 율장에는 조문이 없지만, 계율정신에 의하면 수행자는 탐진치의 중독에서 벗어나 근원, 즉 부처로 돌아가고자 수행을 하는 자들인데, 하물며 담배에 중독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계율은 우리가 수행함에 있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상좌부, 대승 등의 계율서도 다양하거니와 부처님 당시의 상황과 현 대한민국의 승려 생활과는 맞지 않는 현실적인 부분들로 인해 초발심자인 저희들이 계율에 대한 바른 이해, 바른 사유 그리고 계율을 바탕으로 한 바른 수행을 하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원효대사는 『보살계본지범요기』를 통해 ‘보살계는 흐름을 거슬러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는 커다란 나루이고, 삿됨을 버리고 바름으로 나아가게하는 긴요한 문이다’고 말합니다. 제도적이고 형식적인 면보다는 계율의 근본정신을 강조합니다. 바로 ‘마음’을 바탕으로 한 계율해석입니다. 원효대사의 계율관에 의하면 계율은 이 일심一心에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일심에 도달하게 해줍니다.
계율의 양극단 사이에서 일심을 바탕으로 계율해석을 할 경우 절대성에 대한 집착을 파할 수 있었고, 철저한 계율정신을 바탕으로 상황에 따라 지범개차를 할 경우 상대성에 대한 집착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원효대사의 계율관에서 보았듯이 계율은 우리의 일심에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며, 또 일심에 도달하게 해주는 것이 계율이라는 점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월암 큰스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오욕락에 물들고 물신풍조가 만연하였다 하더라도 출가인의 삶은 출가자다운 청빈과 절제를 유지해야 수행의 근간이 유지되고 인천의 사표로서의 위상이 정립될 수 있는 것이다. 수행의 근간이 유지되고 세간의 귀의를 받기 위해서는 첫째도 둘째도 계율이 제대로 수지되어야 한다. 청정계율이 무너진 승가는 더 이상 중생의 복전이 될 수 없다.
이 자리에있는 저와 대중 스님들께 여쭙습니다.
이 가운데 청정하십니까.
이 가운데 청정하십니까.
이 가운데 청정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