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봄철 차례법문
정견으로 가는 길
사집반 정견
따스한 기운은 생명들을 푸릇푸릇 깨어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운문사의 도량 곳곳에서도 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견으로 가는 길’이라는 주제로 발표하게 된 사집반 정견입니다.
처음 삭발하고 정견이란 법명을 받았을 땐 그냥 단순히 ‘바르게 보라’라는 뜻이겠거니 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정도를 알고 난 후 그 수행 방법의 첫번째가 정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직도 정견이란 개념이 어렵고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차례법문을 통해 제 법명이기도 한 ‘정견’이 뭔지 알아보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하였습니다.
정견은 팔정도의 가장 첫번째 수행 방법으로 바른 견해(正見)를 말합니다. 바른 견해는 빠알리어로 삼마 딧타입니다. 삼마는 ‘바른’이라는 뜻이고 딧티는 ‘보다, 알다, 이해하다’라는 뜻입니다. 가령 우리가 길을 나선다고 해 봅시다. 그때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발걸음을 내디딘다면 제대로 길을 갈 수 있을까요? 마땅히 목적지와 방향부터 정하고 길을 나서야겠지요. 이에 해당되는 것이 바른 견해이기 때문에 팔정도에서 바른 견해가 제일 앞에 섭니다.
실천도로서의 바른 견해는 ‘있는 그대로’를 보는 눈을 갖추는 데서 시작됩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근시안적이고 좁고 낮고 편중된 눈으로 자기중심으로 자기 편한 대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말도 여러 수준이 있을 텐데 최상의 지혜자가 궁극적으로 가늠한 견해, 그것이 최고 수준의 바른 견해가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바른 견해는 사성제(四聖諦)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고 사성제를 토대로 세상과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요컨대 부처님의 깨달으신 그 눈으로, 사성제를 꿰뚫는 그 안목으로 이 세상과 인생과 자신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 그것이 바른 견해가 될 것입니다.
견해라고 하는 것은 분별심에서 나오게 됩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견해,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가 있을 때 그때 괴로움이 생깁니다. 아무리 옳은 견해라도 고집하고 집착해서 강요하면 상대방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도 괴롭히고 남도 괴롭힐 수 있습니다. 또한 이는 상대적일 뿐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말하는 정견은 가장 옳은 견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겠습니다.
바른 견해란 견해가 없는 견해를 말합니다.
사견은 삿된 견해가 아니라 견해를 취하고 있는 것이 바로 사견이라 하겠습니다. 정견에서 말하는 사견은 옮은 것 그른 것이 다 사견인 것입니다. 이 양극단을 벗어난 것 중도적인 견해가 팔정도의 정견입니다. 틀렸다는 생각 그것을 없애야 해 하는 것도 사견이고, 누가 봐도 옳은 것을 옳다고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도 사견인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팔정도 첫 번째 ‘정견’은 옳은 견해가 아니라, 옳다거나 그르다고 하는 분별심이 없는 양극단의 치우친 견해가 없는 어떤 견해에도 취착함이 없고, 기준이 무너졌을 때 해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맛지마니까야』
부처님께서는 “여래는 그 어떤 견해도 취하지 않으며 모든 견해를 없애버렸다. 여래는 모든 견해, 모든 짐작, 모든 ‘나’라는 견해, ‘나의 것’이라는 견해를 깨버렸고 떠났으며, 멸해버렸고 없앴기에 그 어떤 사견도 생겨나지 않아 해탈을 얻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올바른 견해를 갖고 나서 내가 깨달은 게 아니라 그것을 깨트리고 없애더니 부처가 되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놀랍고 황당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불교 공부도 세간의 공부처럼 불교는 어떤 주장을 하고 있으며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어느 게 더 옳은지 그른지 따져 나가는 가르침이며, 많이 배우고 채우고자 했고 앎을 늘리면 깨달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또 그런 식으로 불교 공부를 접근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정견은 수 많은 견해들을 싹 다 버리는 것이 정견이라고 합니다. 쉽게 ‘이게 올바른 것이니 이것만 믿어라 다른 것은 삿된 것이니 안된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면 우리는 그것만 받으면 정견을 증득할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우리 삶의 괴로움은 정견을 지키지 못해, 정견에 대한 지혜나 안목이 없는 데서 옵니다. 괴로워하는 마음의 이면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특정한 견해들이 있습니다. 내가 옳다고 하는 견해, 그것을 믿어 버리면 집착이 생기고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는 성냄, 화가 일어나고 그 생각 자체가 어리석음, 치심인 것입니다.
팔정도를 닦으면 삼독이 소멸돼서 열반 해탈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정견에서 바로 탐진치 삼독이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정견만 바르게 닦을 수 있으면 탐진치가 생기지 않습니다. 탐진치 삼독이 생기는 것은 우리가 사견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사견인 줄 모르고 그것을 쥐고 있습니다. 왜냐면 내 생각이 옳으니 나쁘게 사는 것보다 착하게 사는 게 옳지 않느냐 그것이 옳다 라고 고집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옳다고 고집하는 그 생각이 사견인 줄 모르고 말이죠. 고집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왜 고집하겠습니까?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저는 본래 도전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낯설고, 새롭고, 익숙하지 않은 것에 두려움이 많은 편입니다.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 걱정부터 앞서고, 남들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까? 평가받는 것 같아 싫고, 그래서 “전 못 해요. 한 번도 안 해 봤어요”라는 말을 먼저 내뱉고 이렇게 뒷생각이 많아서 저지르지도 못하고 온갖 분별 망상 때문에 항상 주저하는 삶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의 이면에는 나 역시 다른 사람을 내 견해로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이겠지요.
한 번은 수업 시간에 법명에 대해 얘기가 나온 적이 있었는데 한 도반 스님이 은사스님이 본인과 반대되는 걸 법명으로 지어준 것 같다고 말하길래 “그럼 난 사견덩어리라 정견으로 지었다는 말이에요” 라고 하며 우스게 소리를 한 게 기억이 나네요.
‘정견’을 공부하면서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정견이 바로 서면 집착하지 않게 되고 모든 게 공하다는 진실에 뿌리내려 반드시 이래야 하고 반드시 저래야 하는 것도 없고 두려움도 괴로움도 없이 삶을 보다 가볍게 살 수 있을텐데....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고 삶을 내 뜻대로 통제하지 않으면서 마음은 내서 최선을 다하지만 그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안된다고 절망하지도 좌절하지도 않고 말이죠.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여기서 자유가 오지 않을까요?
정견이 내 마음속에 깊이 뿌리 내리길 서원합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