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에 숨어있는 나
안녕하십니까 사교반 삼우입니다.
저의 차례법문 내용은 이번 겨울방학때 삼천배 기도를 하면서
평소 말에 끄달리는 경계로 인해 나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정진하면서 제가 느꼈던 걸림없는 자유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2024년 갑진년 ’푸른용의 해“를 맞이해 정초기도로 삼천배 3일기도를 하게 됐습니다.
행자때 삼천배 백일기도 경험도 있고, 지난 철 ’생사의 장‘에 이어 ’자비참 기도’를 회향 하면서 안정된 마음 상태가 너무 만족스러웠던 저는 정초기도를 하라는 어른스님의 말씀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백일도 했는데 3일쯤이야‘하며 아주 가볍게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쉽게 생각했던 탓인지 행자때 신심 가득했던 그 마음은 찾을 수 없었고
자비참 기도후의 안정된 상태도 이미 사라진 상태였으며,
분별 가득찬 마음으로, 매일하는 일과절로 아주 익숙하고 능숙한 자세로 빠르게 절만 하는 제가 있었습니다.
제가 기도를 시작할 때쯤, 저희집 행자님이 삼천배 100일 기도를 끝내고 학인인 저에게 막습의를 받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대중생활에서 지켜야 할 사항, 행자로써 익혀야할 기본적인 것을 알려주는
아주 간단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자님과의 소통은 싶지 않았습니다.
따박따박 말 대답 하는 행자님의 말에 휘둘려 제가 스트레를 받고 있었습니다.
행자님이 할수 있는 말은 딱 세마디 ” 예 / 잘못했습니다 /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
라고 몇 번이고 아주 자세히, 친절하게, 설명 해줬고
궁금한 것은 일단 해보고 나서 다음에 질문하라고 했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건지, 친절한 설명이 독이 된 건지 습의한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시자스님께서 하라고 했습니다. 도감스님께서도 아무말 하지 않았습니다’ 라는 말을 앞세워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행자님과의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처음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저는
말 대답하는 행자님의 태도가 ‘아직 행자니까 아직 모르니까’ 하는 식으로 넘어가기엔
지나치다고 생각했고 목소리만 들어도 화가 났습니다.
”내가 이상한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아니야 행자님이 이상해“하며
행자님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소임자 스님께서는 ’한 두번 얘기해서 안 들으면 그냥 두세요’ 라고 하셨지만
그 한 두 번이 건건이 다른것도 있었고, 유난히 책임감이 강한 저는 습의는 학인의 몫이고, 의무이고, 지금은 내가 학인 상차서니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는 사명감에 대충 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고 보자는 마음심보니 행자님이 이쁘게 보일리 없었습니다.
기가 나보다 훨씬 센 행자님을 상대로 일일이 반응하는 것도 창피하긴 했지만,
반응을 안할수 있을 만큼의 수행력도 되지 않았던 저는 그런 제 자신에게도 화가 나 있었습니다. 얼마나 열을 냈는지 습의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기가 다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도를 시작했으니 기도가 순조로울리 없었습니다.
기도 첫날 법당에서 천 배를 마치자 마자 또 새로운 건으로 얘기를 하는데,
이번에는 대놓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행자님 태도에 더는 안되겠다 싶어 소리를 꽥
질렀습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큰 소리에 행자님의 기세가 한 풀 꺽인 듯 했으나
저의 마음은 더 심란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들뜬 마음을 집중 하려고 애썼지만
불쑥불쑥 올라오는 분별심과 분한 마음 등 찜찜하게 첫날 기도를 마쳤습니다.
둘째날은 행자님에 대한 번뇌를 철벽 방어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최대한 큰 목소리로 부처님을 불렀습니다.
한분 한분의 부처님을 부를 때 마다 온 마음을 다해 집중 했습니다.
다른 생각이 조금이라도 끼어들면 더 크게 부처님을 불렀고
오로지 부처님께 정말 악착보살처럼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집중이 되기 시작하면서 마음은 편안해지고 고요했습니다.
제가 부르는 부처님소리만 법당에 울리고 있을뿐
절을 하고 있다는 것도, 공간도, 나라는 생각도, 그 어떤것도 없었습니다.
어떤 번뇌도, 생각도 없는 상태였지만 분명히 나를 지켜주는 뭔가가 있었습니다.
법을 지니는 것이 이런거구나.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괴로워하는 그 번뇌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 환희심이 올라왔습니다
내가 이 기도를 하기까지 노스님 은사스님을 비롯해 대중의 배려와 일체 모든 만물의 공덕으로 이 기도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가슴이 메어 오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내가 기도 한다고 내 기도가 아니고, 내가 쓰는 시간이라고 내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1분 1초도 허비할수 없었습니다.
후원에서 한끼 공양을 위해 도감스님을 비롯해 전대중이 열심히 준비를 합니다.
그런 귀한 공양을 받고 대중의 공덕으로 기도 하면서 사사로이 분별심을 일으켜 기도를 망칠려는 어리석음에 절로 참회의 눈물이 났습니다.
간절함이 올라오자 기도에 활기가 생겼습니다.
내가 지금 놓치고 있는 그것을 찾아야 했습니다.
내가 출가한 이유부터 지금 내가 괴로운 이유까지...
하나하나 다 짚어봐야 했습니다.
이리 저리 아무리 생각해 봤지만 이유는 너무 간단했습니다.
단지 내 말 대로 하지 않는 행자님의 태도에 화가났을 뿐이었습니다
‘내가 너보다 위다’라는 것을 무기로 상대방을 누르려고 했습니다.
평소 저는 윗사람에게는 무조건 ‘예’ 하는 편입니다.
이거 하세요 하면 ”네“ 저거 하세요 해도 ”네“
반대로 아랫사람 에게는 내 방식을 강요하는 쪽이라는 것을 강원에 와서 알게 됐습니다.
아랫사람에게도 자상한 사람이길 바랬지만
저에게 그런 자비심은 없었고 독재기질의 제 자신에게 크게 실망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저의 무자비함이 행자님을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저의 독재와 강압적인 모습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고
행자님때문에 기분 나빴던 그 지점을 잘 보면 항상 “내가. 내말이”하는 “나”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윗사람을 구분하는 기준도 “나”라는 것을 알고는 온몸에 닭살이 돋았습니다
너무 당연했던 어른이니까 어른이고, 상반스님 이니까 상반 스님이고 하는 기준이
나로부터 위아래가 갈라진다는 사실애 너무나 놀랐고.
곳곳에 숨어서 또아리를 틀고있는 나를 발견하고 말문이 막혔습니다.
”아상”이 이렇게 강한사람 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다만 행자님과의 관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행자님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지만, 지대방에서는 도반들과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모습이었고, 출가전에는 속가 어머니와의 관계였고, 나를 괴롭혔던 직장상사와의 관계였으며 과거 내가 상처를 주고, 상처 받았던 모든 인연들과의 관계였고 또한 내 모습이었습니다.
사교반을 일명 ‘경반’ 이라고 하여 “경을 보는 반”이라는 뜻인데
사교반에 올라와 금강경 첫 시간에 금강경대지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파이집 현삼공]
“이집을 타파하면 삼공이 드러난다”
이집이란 “아”와“법”을 말함이요 삼공은 “아공, 법공, 구공”을 말합니다.
‘나라는 생각’ ‘나의 것이라는 생각“을 내려놓으면 그 자리가 ”공“이요
”나도 공하고, 법도 공하고, 공했다는 생각 자체도 공한 자리가 드러나니“
”그 자리가 바로 무분별지가 일어나는 부처의 자리“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경을 볼때는 그 마음도 경에 비춰보아야 이익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금강경 대지를 듣는 순간 제 속이 뻥 뚫렸습니다.
나에 대한 집착 ”아집“과 내가 하는 말이 다 옳다는”법집“을 악착같이 붙들고 있었으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만약 우리 행자님을 좀더 늦게 만났더라면 제가 좀 공한 이치로 행자님을 대할수 있었을까요?
삼천배 기도를 마쳤을때는
행자님에게 무뚝했던 저의 말투는 부드럽게 변해 있었습니다.
물론 그리 오래 가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경험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행자님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놓쳤을뿐입니다
걸림없는 자유로움, 객관세계를 볼수 있는 힘이 정진에서 나옴을 알았습니다.
정진의 힘이란게 이런 것이구나. 일과절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해야하는 이유이고
화두참선을 하는 이유도 행자님으로 인해 알게 됐습니다.
저는 이번 만배를 통해 내 아상이 뻣속 깊이 박혀있다가 때가 되면 언제든지 튀어나온다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경계에 속지 않기위해 정진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돌아올수 있는 기회가 너무나 많습니다.
눈뜨면서 도량석이 울리는 순간부터, 상강례. 수업. 울력등...
매순간 ’한생각‘에서 벗어나 그 자리로 돌아오라고 나를 깨워주고 있습니다.
여러 대중스님들 께서는 어떻습니까?
내 속에 어떤 내가 숨어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나를 안다는 것 일미중에 일미랍니다.
아주 잠시나마 맑고 청정한 자리를 볼수 있도록 해준 모든 인연들께 감사드리며
저 때문에 맘 고생 했을 행자님에게도 미안한 마음 전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어른스님이하 대중스님들께서도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출가전 부터 자주 되뇌었던 법륜스님의 ”행복“이라는 책의 한 구절을 끝으로
법문을 마칠까 합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지어낸 것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진실로 그 행복과 불행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 아니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