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차례법문

운문사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4년 재학 동안 단 한번 차례대로 법상에 올라서 대중에게 법문한 내용입니다.

아름다운 구속 - 화엄반 선혜

가람지기 | 2024.09.10 19:25 | 조회 118

아름다운 구속

 

아름다운 것보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찾기가 더 어려운, 따스하고도 찬란한 이 봄에 차례법문을 하게 된 화엄반 선혜입니다.

삭발 염의하고 난 후로 가장 많이 입에 올리기도 하고 가장 많이 듣기도 한 단어 중에 가피력이 있습니다.

절집에 있다 보면 누군가는 부처님의 말씀에 삶의 지혜를 얻었다고 하고, 누군가는 목숨을 건졌다고도 하며, 누군가는 대학입시나 취업에 성공했다 하는 부처님의 가피력에 감사하는 인사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제자들인 대중스님들께서는 각각 어떤 가피를 입고 계십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좇아 수행자의 삶을 선택한 저는 승가에 소속되어 대중생활을 하고 있음에 가피를 입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미사색부화혜오분율彌沙塞部和醯五分律에서 대중생활을 하며 명심하고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덕목인 입중오법入衆五法에 대해 말합니다.

 

한때 우파리존자께서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가 승가에 들어가려면 몇 가지 법으로 해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섯 가지 법으로 해야 하느니라. 하나는 뜻을 낮추는 것이고, 둘은 자비심을 내는 것이고, 셋은 공경하는 것이고, 넷은 차례대로 앉는 자리를 아는 것이고, 다섯은 다른 일을 논하지 않는 것이니라.

 

  모든 것을 처음부터 가르쳐주지 않는 강원생활에 어려움은 참으로 많습니다. 한 발을 내딛기가 어려울 정도로 새롭게 배워야 할 것들이 많은 생활들 속에서 우울해지지 않고 바른 노력을 하기란 쉽지 않은데요.

분명 무상이고 무아라고 배웠음에도 육신이 허물어져가는 고통은 너무나 생생하고, 다른 이의 비판에는 진실한 참회의 말 대신 삐죽삐죽 변명이 튀어나옵니다. 타인이 내는 분별심은 거울같이 보아 인상을 찌푸리지만 스스로의 시비심은 너무도 정당하게 생각되고 마니 총체적 난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를 두고 원각경』 「금강장 보살장에서는

 

비여동목譬如動目이 능요담수能搖湛水하며

우여정안又如定眼이 유회전화由廻轉火하니

운사월운雲駛月運하고 주행안이舟行岸移하니

역부여시亦復如是하니라

마치 움직이는 눈이 능히 잔잔한 물을 요동시키는 것과 같으며

또 움직이지 아니하는 눈이 회전하는 불을 따라 도는 것과 같다.

구름이 지나감에 달이 움직이는 것과 배가 지나감에 언덕이 움직이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

 

라고 비유하고 있어, 중생이 윤회하는 마음으로 내는 소견은 오직 또 다시 윤회하는 소견을 낳을 뿐, 이러한 마음으로 여래의 대열반 경지를 알려고 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 합니다.

이는 곧 아는 것이 행동을 앞설 뿐, 진리를 철견하지 못해 진실로는 한 법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전도된 사유를 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집 겨울철 명부전 부전소임을 살던 때,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예불을 올리기 전 각각의 지

옥문에 자리하신 시왕님들을 보며 생각에 잠기곤 하였습니다.

오늘 나는 또 무슨 악업을 지어서 어떤 지옥을 스스로에게 만들어 주었던가?”

 

심서다단心緖多端 중처편추重處偏墜’, 마음은 많은 실타래의 끝과 같아 무거운 쪽으로 기운다고 위산대원선사경책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오랫동안 익혀서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나쁜 습관은 자주, 그리고 아주 빠르게 마음도량에 풍랑을 일으켰습니다. 24시간 중 23시간 58초간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일들도 단 2초간 기울어진 마음의 거센 흐름으로 하루, 이틀, 길게는 일주일을 분노로 장엄한 지옥으로 만들었고, 때론 끝없이 허덕이는 아귀도가 되게 하였으며, 어느 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축생도로 만들기도 해서 겨우 2초였을 찰나에 주인자리를 내어주고 마는 일상에 실망하고 지쳐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굳건한 정견正見을 세우지 못한 저 같은 초심수행자가 스스로의 뜻을 낮추어 자비심을 내며, 차서를 지켜 타인을 공경하고, 대중 가운데 세상일을 말하지 않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까요?

인간이 습관대로 혹은 업대로 산다고 한다면 사실 정말 어려운 것은 아는 것을 넘어 실천하는 것이고, 하심하는 것보다 하심을 계속 유지하는 일일 것입니다. 혹시 수행의 길목에서 저처럼 방황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혼자서의 힘으로는 도무지 익히기 어려운 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으로 24시간 채우기를 대중의 도움으로 익혀 채워 보심은 어떠실런지요?

몸과 마음이 편하기만 한 곳에 있었다면 도를 구하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음이요, 스스로를 이만하면 충분하다 안주하거나 혹은 하지 못한다고 획을 긋고 말아버릴 일들도 대중생활을 함으로써 드러나게 되니 그제야 비로소 자신을 바꿀 기회를 얻기도 하고 바꾸려는 노력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목탁소리 울림에 곧 나아가니 게으르지 않는 것을 배웁니다. 달고 쓴 것을 함께 받으니 간택함이 없는 것을 배웁니다. 이렇게 다른 누구를 이기는 것도 아닌 스스로의 마음을 이겨내어 인욕하는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 서로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 지음이요. 가피가 아닐까요.

주어진 환경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에서도 마음이 자유로워 처처에 자재할 수 있음을 배울 수 있는 이 아름다운 구속에 두 손 모아 감사하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인연임을 알게 되는 가피를 입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발원합니다.

끝으로 오늘 하루도 스스로 만든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을 모든 지옥 중생들을 위해 저녁종송을 올리며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 종소리 듣게 되면 온갖 번뇌 끊어지고

밝은 지혜 자라나고 보리심이 생겨나며

지옥세계 멀리 떠나 삼계고를 벗어나고

깨달음을 이루어서 모든 중생 건져지이다.

파지옥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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