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속의 행복, 홀로의 행복
안녕하십니까, ‘관계 속의 행복, 홀로의 행복’이라는 주제로 차례법문을 하게 된 대교반 혜견입니다. 오늘 저의 법문은 행복하고자 하는 모든 존재들을 위해 준비해봤습니다. 여러분도 행복해지고 싶습니까?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먼저 저의 경험담으로 시작을 해보겠습니다.
저는 어릴 때 사람을 참 쉽게 좋아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다 옆에 앉았던 분이 조금만 놀아줘도 그분이 너무 좋아져서 내릴 때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쉽게 마음을 뺏기던 그 어린아이는 그만큼 자주 슬픈 이별을 경험했겠지요.
하지만 무슨 복이 있어서인지 어딜 가나 훌륭하신 스승들과 좋은 분들을 만났기에 그런 작은 이별들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고통’을 인지하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유쾌한 새로운 만남과 순간순간은 조금 슬프지만 조금만 지나면 아무렇지 않은 이별만을 반복하며 살다가, 학교라는 조금 더 넓은 세상에 들어서면서 관계의 끝에는 물리적인 헤어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갈등이라는 정신적인 조건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제 분명히 나에게 사랑스러운 눈빛과 달콤한 말로 기쁨을 주던 친구가 오늘은 사랑스럽지 않은 눈빛과 아주 쓴 말로 나의 삶을 비극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충격을 받습니다. 그런 일은 반복되고 그때마다 정답을 맞출 수는 없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면 그런 상대의 마음에 변화를 주는 원인은 날마다 달랐고, 제가 느낀 배신감에 비해 심지어 사소하기까지 했습니다. 어떤 날은 이유 없이 제가 좀 귀찮았거나, 저보다 더 흥미로운 다른 대상이 생겼거나, 제가 다른 친구와 더 즐겁게 노는 모습을 보고 질투심이 일어났거나, 저를 비방하고자 하는 다른 친구가 하는 사실이 아닌 말을 들었거나, 아니면 단지 아침에 엄마한테 혼이 나서 기분이 조금 안 좋았던 겁니다.
조금 더 자라면서 저는 친구를 길들이는 8만 4천 가지 기술을 개발합니다. 제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는 상대방의 태도는 늘 저를 승리자로 착각하게 만들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결국은 누리는 게 더 많은 제가 더 의존하는 쪽이 됩니다. 하이라이트로, 더 이상 제 인생에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존재로 자리 잡은 저의 메이트는 죽음이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이별형태로 저를 떠나죠. 한 명, 두 명, 세 명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은연중에 제가 전생에 지은 악업의 과보일지 모른다는 숙고도 해봤지만 연기법도 모를 때였고, 모르니 신심도 없어 그저 이해 안 되는 이 세상에 대해 서운하고 서럽기만 했습니다.
다음은 상윳따 니까야에 나오는 부처님께서 해주신 대나무를 타는 곡예사의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대나무를 타는 한 곡예사와 메다까탈리까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곡예사가 제자와 함께 공연을 하기 전에 제자를 불러서 말했습니다.
‘오라, 착한 메다까탈리까여. 그대는 내가 대나무를 탈 때 내가 잘 할 수 있도록 나를 잘 지켜보고 보호하라. 나는 그대가 대나무를 탈 때 그대가 잘 할 수 있도록 그대를 보호하리라.’
이렇게 말하자 메다까탈리까는 자신의 스승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이시여, 스승님께서는 스승님께서 잘 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보호하십시오. 저는 제가 잘 할 수 있도록 제 자신을 보호하겠습니다.’라고.
이 두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을 찾으셨습니까? 네, 우리 모두는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고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자신에게서가 아닌 타인에게서, 즉 관계 속에서 찾으려 합니다. 나의 가족이, 나의 친구가, 나의 연인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를 바라지만 그 행복이 절대적이지도 지속적이지도 않아서 괴로워합니다.
우리의 몸은 늙고 병들어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도 언젠가는 헤어져야만 하고, 우리의 마음도 늘 조건 따라 변하기 때문에, 관계 속에서 행복을 찾다가 한계를 느낍니다. 이 한계는 고통이지요. 우리들의 경우 이렇게 철저한 고통을 경험한 후 홀로의 행복을 찾아 출가를 한 거죠. 그런데 모든 관계를 끊고 삭발염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떨어지지 않는 갈애와 생에 대한 집착, 그리고 무지 때문에 이 옷을 입고도 우리는 아직 타인에게 인정,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어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럼 우리가 찾는 홀로의 행복은 어떤 단계를 거쳐서 이루어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몸의 출리입니다. 세속에서 가족들과 부둥켜안고 몸을 비비며, 친구들과 손잡고, 강아지와 뽀뽀하며 지내던 시간들이 기억나시나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육체적으로 벗어난 상태를 몸의 출리라 하는데, 대중과 함께 살아도 사람들과 주거니 받거니 교제하지 않고, 각자 자신의 수행에 전념하며 사는 것 또한 몸의 출리라고 합니다. 수행을 위함이 아니고 번뇌가 대중생활을 불편해 하니까 홀로 사는 것은 몸의 출리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도 수행이 다 된 사람이 아니면 승가와 함께 살기를 권하셨습니다.
둘째, 마음의 출리입니다. 몸의 출리만으로는 마음의 장애요소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명상주제에 마음을 전념함으로써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혼침, 들뜸, 의심 등의 번뇌가 고통임을 자각하고 장애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것이 마음의 출리의 시작입니다. 몸의 출리는 그나마 쉽지만 마음의 출리는 번뇌를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오랜, 또는 여러 생이 걸리기도 합니다.
마지막은 오온五蘊으로부터의 출리입니다. 조건 지어진 물질과 정신, 즉 오온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여 오온의 소멸인 열반을 성취한 때가 오온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입니다.
몸의 출리가 되어야 마음의 출리가 가능하고 마음의 출리가 완성되어 번뇌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을 때 모든 고통의 원인인 오온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홀로의 행복이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완전한 행복입니다.
이 홀로의 행복으로 ‘자리自利’를 성취한만큼 ‘이타利他’로 회향하는 것이 저희 출가자의 목적이겠지요. 취착 없는 ‘자애’와 ‘사랑’으로 홀로의 행복을 관계 속의 행복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지혜가 2,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들에게 지혜를 주고 있듯이 우리도 세상 사람들이 고통 없는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안내할 수 있는 스승이 되기 위해 ‘강원’이라는 이 완벽한 환경에서 수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행복합시다!
그럼 다 같이 공덕회향 후 법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따라해 주십시오.
오늘 하루 수행하고, 계를 지키며, 법문을 설하고 들은 저의 이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합니다. 이 공덕으로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 슬픔이 없는 열반에 이르기를 발원합니다.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