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숨결이 깃든

호거산 운문사

삼국유사 속 운문사


보양과 이목

승령 보양전에는 고향과 성씨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삼가 살피건데 청도군 사적에는 이러하다.
천복 8년 계묘(태조 즉위 제 26년임) 정월 일에 청도군 계리심사 대내말 순영과 수문등의 주첩공문에 보면, 운문사 선원 장생의 남쪽은 아니점이요, 동쪽은 가서현이라 하였고 동수삼강전 주인 보양화상, 원주 현회장로, 정좌 현양상좌, 직세 신장로, 정좌 현양상좌, 직세 신원선사라고 하였다.

(위의 공문은 청도군 도전 장전에 준한 것임)

또 개운 3년 병진의 운문사 선원의 장생표탑 공문 한 통에는 장생이 11인데, 아니점 가서현,무현,서북매현[면지촌으로도 되어 있음],북저족문 등이라고 하였다. 또 경인년 진양부첩에는 5도의 안찰사가 각 도의 선교사원을 처음으로 창건한 년월과 형지를 조사하여 장부를 만들 때 차사원이던 동경장서기 이선이 조사하여 기재한 것이라고 하였다.
정풍 6년 신사[대금의 연호로서 고려 의종 즉위 16년임] 9월의 군중 고적비보기에 따르면 청도군의 전 부호장 어모부위 이칙정의 호적에 옛사람의 소식 및 언전에는 기록하기를, 치사 상호장 김양신, 치사 호장 민육, 호장 동정 윤응전, 기인 진기 등과 당시 상호장 용성 등의 말이 있다. 그때 태수 이사로, 호장 양신의 나이는 60세 이상이었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운운하였는데 다음은 준하지 않았음).
신라시대 이래 이 군의 사원으로서 작갑사 이하 크고 작은 사원은 삼국이 난리로 인하여 망해갈 즈음 대작갑,소작갑,소보갑,천문갑,가서갑 등 5갑의 절이 모두 파괴되고, 5갑의 기둥을 합쳐서 대작갑사에 두었다. 조사 지식(知識: 위의 글에서는 보양이라고 하였음)이 대국에서 불법을 전수받고 돌아오다 서해 가운데 이르렀을 때 용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외게 하고 금실로 수놓은 비단가사 한 벌을 주었다. 겸하여 한 아들 이목을 주어 받들어 모시고 뒤따라가게 하면서 부탁하기를, “지금 삼국이 소란하여 불법에 귀의한 군주가 없지만, 만약 내 아들과 더불어 본국의 작갑으로 가서 절을 짓고 거처하면 적병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몇 년 안에 반드시 불교를 보호하는 어진 임금이 나와 삼국을 안정시킬 것이요.”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자 서로 이별하고 돌아와서 이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스스로 원광이라고 일컫는 노승이 인궤(印櫃)를 안고 나타나서 전해 주고 사라졌다.
[살피건대 원광은 진나라 말기에 중국으로 들어갔다가 개황 연간에 동쪽으로 돌아와서 가서갑에 머무르다가 황룡사에서 죽었으니, 계산해 보면 청태 초에 이르기까지 무려 300년에 달함. 이제 여러 갑사가 모두 황폐한 것을 비탄하다가 보양이 와서 장차 일으키려고 한 것을 기뻐하여 고한 것이리라].
이에 보양이 황폐해진 절을 일으키려고 북령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뜰에 5층 황탑이 있었으므로 가서 찾아보았으나 자취가 없었다. 다시 올라가서 바라보자 여러 마리의 까마귀가 땅을 쪼고 있었다. 이에 바다의 용이 작갑이라고 한 말이 생각나서 찾아 파보니 과연 무수한 벽돌이 남아 있었으므로 모아서 높이 쌓아 탑을 완성하자 남은 벽돌이 없었다.
이에 이곳이 전대의 절터였음을 깨닫고 절을 세워서 건주하며 인하여 작갑사라고 이름하였다. 얼마 후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였는데, 법사가 이곳에 절을 짓고 산다는 말을 듣고 5갑의 전답 500결을 합하여 이 절에 주고, 청태 4년 정유에 운문선사란 액호를 내렸으며 가사의 영음을 받들었다.
이목이 항상 절 옆에 작은 못에 살면서 불법의 교화를 도았는데, 어느 해 갑자기 가뭄으로 밭의 채소가 타게 되자 보양이 이목에게 명하여 비를 내리게 하였다.
그러자 한 경내에 흡족하게 비가 내렸는데, 천제가 자신도 모르게 하였다며 장차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이목이 법사에게 급히 고하였다. 법사가 이목을 상 아래에 숨겼는데, 얼마 후 하늘의 사자가 뜰에 이르러서 이목을 내놓으라고 청하니, 법삭 뜰 앞에 있는 배나무를 가르키자 벼락을 내리고 하늘로 올라갔다. 벼락을 맞은 배나무는 부려졌는데, 용이 어루만져주자 즉시 소생하였다(또는 보양이 주술로써 살렸다고 함). 그 나무가 근년에 쓰러지자 어떤 사람이 방망이를 만들어서 법당과 식당에 두었는데, 그 방망이 자루에 명(銘)이 있었다.
처음에 법사가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먼저 추와의 봉성사에 머물렀는데, 마침 태조가 동쪽 지방을 정벌하여 청도 땅에 이르렀을 때 산적이 견성(犬城: 우뚝한 산봉우리가 물가에 있는데 오늘날 세인들이 그 이름을 좋지 않게 여겨서 견성으로 고쳤다고 함)에 모여서 교만하기 짝이 없었다. 태조가 산 아래에 이르러서 법사에게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술책을 물으니, 법사가 답하기를, “대저 개라는 동물은 밤에는 지키고 낮에는 지키지 않으며, 앞쪽은 지키지만 뒤쪽은 잊어버립니다. 그러니 마땅히 낮에 그 북쪽을 공격하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그 말대로 하여 과연 패배시키고 항복을 받았다.
이에 태조가 그 신모(神謀)를 가상하게 여기고 해마다 가까운 현의 조세 50석을 주어서 향화를 받들게 하였기 때문에, 절에 태조와 보양 두 성인의 진용을 안치하여 봉성사라고 이름하였다. 후에 법사가 작갑사로 옮겨서 크게 창건하고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법사의 행장은 고전에 실려 있지 않다. 속전에 말하기를, “석굴사 비허사[備虛師: 혹은 비허사(毗虛師)로도 되어 있음]와 형제가 되고, 봉성사,석굴사,운문사 세 절이 봉우리를 맞대고 나란히 있어 서로 왕래하였다.”라고 한다. 후세 사람이 신라의 <수이전>을 개작하면서 함부로 작탑과 이목의 일을 원광법사전에 기록하고 견성에 관계된 것을 비허전에 실은 것은 잘못이다. 또 <해동승전>을 지은 자가 그것을 따라 윤문함으로써 보양의 전이 없게 하여 후세 사람이 의혹을 품게 하였으니, 그 얼마나 무망한가.